키드 The Kid (1921) ★★★★★
찰리 채플린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인물이다. 감독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감독 겸 배우라고 썼다가, 뭐라고 써야할 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다 지우고 인물이라고 고쳤다. 예전엔 텔레비전이 영화를 보는 꽤 좋은 창구였는데, 대충 내가 5살 때쯤부터 EBS에서 주말의 명화 느낌으로 낮 시간대에 고전 영화를 틀어주곤 했다. 그 때 거의 격주 간격으로 채플린의 영화를 해줬고, 나는 다른 걸 하다가도 (대개는 만화책을 보는 정도의 일이지만) 채플린 영화가 시작되면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와서 채널을 고정해놓고 보곤 했다.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아버지가 DVD를 사다 주셨고, 틈날 때마다 매일같이 돌려보았다. 자서전이나 관련 서적도 학교 도서관에 신청해서 빌려 읽고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채플린이 으레 콧수염을 붙이고 중절모를 쓰고, 바게트 빵처럼 생긴 신발을 신고 나오는 중-장편 영화는 다 좋아한다. 솔직히 그의 단편은 장기간 많은 수를 찍어내서 뮤추얼 사 이적 전의 작품들은 퀄리티가 들쑥날쑥하다. 중-장편은 믿고 보아도 된다. <키드> 는 <어깨 총> 처럼 서서히 중편에 가까운 단편을 찍기 시작한 그가 처음으로 찍은 1시간 분량의 장편이다. 어쩔 수 없이 스토리 라인은 조금 약하긴 하다. 하지만 강렬한 전제를 깔고 무섭게 몰아붙이는 코미디 앞에서, 정신을 잠깐만 놓으면 감동이 찾아오는 어쩌면 짧기에 좀 더 유리한 구조이기도 하다.
가난한 화가는 애인을 버린다. 여인은 홀로 그의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 아이를 키울 방도가 없는 여인. 여인은 아이를 조용한 골목에 고이 놔둔다. 이 고아를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펴 달라는 메모와 함께. 그런데 아뿔싸. 지나가던 찰리가 이 아이를 발견한 것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아이가 당신 아이가 아니냐며 건네기도 하고, 지나가던 행인한테 떠넘기기도 하던 찰리는 때마침 나타난 경찰의 눈초리 때문에 꼼짝없이 아이를 데리고 온다. 메모를 발견한 찰리는 아이를 보살피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때,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한 여인이 다시 나타나지만 아이는 온데간데 없다. 찰리는 정성으로 아이를 키워낸다. 아이가 돌멩이로 유리창을 깨면 자신이 모른 척 지나가다 유리를 다시 발라주는 백 퍼센트 무한동력 가내수공업으로 연명하며 가난하지만 소박한 행복이 가득한 가정을 일군다. 하지만 아이가 병에 걸리면서, 찾아온 의사가 찰리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복지부와 경찰들이 이 행복하고 불안한 가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찾아온다.
찰리 채플린 하면 항상 떠올리는 것들이 모두 들어있는 영화다. 1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자막을 딱히 이해할 수 없어도 웃고 울 수 있는 영화다.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만, 당연히 아쉽기도 하다. 아쉬운 점부터 말하자면 스토리 전개에 비해 개그 시퀀스가 꽤 길고 잦다. 중반부에 꽤 긴 비중으로 등장하는 동네 무서운 건달과의 개그 시퀀스는 물론 웃기긴 하지만 조금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플린의 뛰어난 코미디 연기와, 아이 역을 맡은 재키 쿠건의 놀라운 퍼포먼스는 이런 시퀀스마저 웃고 넘길 수 있는 커다란 원동력이 된다. 진짜 엄청 귀엽다.
충분히 웃고 뒤집어지며 관객들에게 정이 들 시간을 준 다음 영화는 잔인하게도 찰리와 아이를 찢어 놓는다. 아이를 진료했던 의사와, 경찰들이 들이닥친다. 그들의 논리도 이해가 간다. 그들은 이 사회의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찰리의 보호는 그들의 기준에서 보호가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도 가난하고 끼니도 간신히 때우는 그들의 삶을 봐온 우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찰리와 아이는 서로가 아니라면 웃을 수가 없다. 누구의 편도 들 수가 없다. 펄펄 끓는 죽 사발을 뜨겁지도 않은지 들고 수틀리면 부어버리겠다는 듯 경찰들과 대치하던 찰리는 기어코 잡혀서 꼼짝달싹 못 하게 된다. 그 틈을 타 사람들은 아이를 데려간다. 이 때 영화는, 트럭에 탄 채로 찰리를 찾으며 세상 서럽게 울부짖는 아이와, 슬픔인지 분노인지 그 감정의 결을 어디에 두더라도 말이 되는, 미친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눈을 부릅뜬 찰리의 모습을 교차로 보여준다. 나는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수많은 영화 팬들이 말하는 <시티 라이트> 엔딩의 그 표정보다도 내게 더 크게 남아있다. 말이 없는 사내에게서 나는 수백 마디의 문장들을 읽을 수 있었다. 이후 펼쳐지는 놀라운 시퀀스는 직접 확인하시길.
<키드> 는 감히 세상이 건드리지도 못 할 사랑을 논하는 영화다. 어떤 시련도 깨뜨릴 수 없는 인류애와, 그러한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강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말하는 영화다. 나는 경찰에게 잡힌 찰리의 표정을 종종 떠올린다. 잃으면 안 되는 것을 잃었을 때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종종 생각한다. 그리고 내게도 그런 마음이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기를 바란다. 그 마음이 그의 영화들이 백 년이 다 된 지금도 살아있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을 하게 만드는 영화를 만들었으면서 사람을 대놓고 울리지 않고, 시대를 타지 않는 영원한 웃음을 선사할 수 있다니. 존경한다는 말로도 부족한, 평생 따라 걸어도 그 끝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놀라운 사람이다. 정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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