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스타 (2006) ★★★★★
전에 다른 블로그에 업로드한 적이 있었지만, 내가 만점을 준 사랑하는 영화들 총 37편에 대한 간단하고 짧은 글을 남길 생각이다. 오늘 기준으로 내가 여태 본 영화는 988편으로 사실 턱없이 적고 창피하지만, 영화를 천 편 이천 편을 더 보든 말든 내가 사랑하는 영화들은 꾸준히 사랑할 것임을 알기에, 지금 시점에서 러브 레터를 쓰는 건 내게도 반가운 일이다. 시작한다.
이준익 감독의 2006년 영화 <라디오 스타>. 이 영화를 말하기 전에 내가 한국 영화 사상 제일 좋아하는 배우 두 명 중 한 명이 안성기라는 사실은 명확히 하고 넘어가야 한다. 스크린이고 테레비고 안성기가 나오면 나는 일단 본다. 열 살 때 이 영화를 보고 그렇게 됐다. 이 영화는 내게 거의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돌을 씹은 정도의 충격이었다. 대단한 스펙터클이 담긴 영화도 아니고 기교가 가득찬 영화도 아니다. 결국 안성기와 박중훈, 둘이 만들어내는 드라마다. 그럼에도 어린 내겐 충격이었다. (여담이지만 제일 좋아하는 나머지 한 명은 송강호다.)
스토리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같다. 88년도 가수왕 출신의 원 히트 원더 락가수 최곤 (박중훈). 최곤은 누가 봐도 몰락한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애써 부정한다. 미사리에서 불륜 커플들을 위해 통기타 라이브 쇼나 하는 게 스케줄의 전부지만, 항상 옆을 지켜주는 매니저 박민수 (안성기). 해봐야 주먹질이나 하는 최곤의 합의금을 마련하던 박민수는 알고 지내던 방송국 국장과 딜을 한다. 합의금을 내줄 테니, 강원도 영월에서 라디오 방송을 맡아달라는 것. 이름하야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 이 시작되지만, 최곤은 열악하고 후진 환경에 기분이 상했는지 있는대로 성질을 부리며 방송에서 개판을 친다. 펑크와 대타가 난무하는 방송에, 심지어는 커피를 배달하러 온 청록다방 김양에게 마이크를 떠넘기는 최곤. 그러나 김양의 사연이 마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서서히 화제가 되면서, 최곤의 방송이 전국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하지만 빛이 생기면 어둠도 생기는 법. 최곤에게 다시금 관심을 가지게 된 소속사 사람들이 찾아오고, 박민수는 자신이 떠날 때임을 직감하게 된다.
최곤의 매니저 박민수는 어떠한 시련이 있어도 최곤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최곤이 매일같이 틱틱거려도, 스케줄이 없어서 굶어도, 합의금을 물어내야 해도, 돈을 빌리다가 (까메오로 나온) 임백천과 김장훈에게 쌍욕을 들어먹어도 사람 좋은 웃음으로 허허 웃고 말 뿐이다. 그런 그가 끝내 최곤의 곁을 떠난다. 인기가 다시 생긴 최곤이 자신을 떠나 소속사로 들어간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평생 가수왕 시절을 그리워하던 최곤에게 그렇게 영광의 시간이 다시 찾아오지만, 박민수가 없으면 최곤에게도 그런 영광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의리만 보고 살아온 20년 세월 때문에 최곤도 박민수도 남은 것 하나 없이 지질하게 살고 있지만, 그들은 다시 뭉친다.
<칠수와 만수>,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까지 모두 성공시킨 명콤비 안성기와 박중훈이지만, 2006년 당시 박중훈의 커리어는 모두가 인정하듯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열 살 짜리 꼬마였던 나도 알 정도로 말이다. 영화 속 최곤의 모습과 박중훈의 모습이 얼핏 겹쳐보이는 것이 이 영화의 감상에 미치는 힘은 대단히 크고, 또 희한할 정도로 진실하다. 조용필의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가 깔리며 등장하는 박중훈과 안성기의 언택트 연기 앙상블은 가히 한국인이 아니라면 그 언어와 비언어적 표현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어쩌면 한국인들의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안으로 씹어 삼켜내는 슬픔은 때로 터져나오는 눈물보다도 뜨겁다.
어떤 영화는 경험으로 기억된다. 이 영화를 총 세 번 보았다. 가족들과 두 번, 몇 년 전 안성기 배우 특별전 때 극장에서 한 번 보았다. 아버지는 이 영화를 보고 거의 승전보를 전하러 한참을 달리다 죽은 아테네 소년처럼 펑펑 우는 내 모습을 신기해하고 또 대견해하셨고, 우리 가족은 몇 달 후 영월로 여행을 가 이 영화의 촬영지 근처에서 묵으며 '라디오 스타 투어' 를 했었더랬다. 두 번 봤을 때도 다 아는데도 똑같은 장면에서 또 죽어라고 울었다. 아버지가 대사를 따라 읊기만 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내게 이 영화는 위력이 컸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흘러 열 살 꼬마는 대학생이 되고, 영화를 공부하는 (혹은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영자원에서 한 안성기 배우 데뷔 60주년을 기념하는 안성기 배우 특별전에 갔다. 자리에 앉았는데,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봤더니 내 뒷줄에 안성기 배우와 이준익 감독이 앉아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조용히 앉아있는데 가슴이 뛰는 리듬이 목을 타고 귀에 들릴 정도로 커졌다.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재미있는 장면에서 으레 우리가 아는, 특유의 비음 섞인 너털 웃음이 뒤에서 들려왔다. 그 때의 기분은 어떻게 말로 설명하려고 해도 벅차서 얼굴만 뻘개지고 뭐라 표현이 생각나지가 않는다. 영자원 객석은 의자가 한 줄로 이어져 있어서, 누가 움직이면 의자의 진동을 그 줄 전원이 느껴야 한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나는 첫 두 번 때보다도 심하게, 거의 오열을 했는데 의자가 너무 삐걱거리는 듯해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앉은 줄이 통째로 나 때문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좀 덜 울려고 했는데 도대체가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날의 경험은 아마 잊으려고 노력해도 잊을 수 없을 거다.
기쁨을 멋쩍은 웃음으로, 슬픔을 무표정으로, 반가움을 괜한 짜증으로. 그렇게 표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말하지 않아도 들킬 것만 같은 내 마음을 어떻게든 숨기고 싶은, 그 정도로 가까운 사람에 대한 나만의 투정을 가장한 애정 표현일 거다. <라디오 스타> 는 그렇게, 소중한 만큼 편한 사람이라 오히려 전하지 못 했던 진심들을 꾹꾹 눌러담은 영화다. 여전히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은 울분을 숨긴, 가슴이 뜨거운 소년같은 박중훈과, 모르는 사람 일이라도 두 팔 걷고 나서서 다들 보고만 있을 거냐며 먼저 돕고 있을 것만 같은 사람 좋은 아저씨 안성기의 진심이 가득 담긴 영화다. 그 진심 앞에서 나는 어떻게 손 쓸 방도도 없이 당할 뿐이다. '비와 당신' 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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