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트 나우 팝스 Just Now Pops (1990s)
어린 시절엔 코미디 영화와 카툰 네트워크의 어딘가 얼빠진 쇼들을 좋아했다. 음악은 솔직히 말하자면 뒷전이었다. 음악을 듣는다는 버릇 자체가 제대로 들지 않았었다. 예능이나 라디오, CF나 영화에서 나온 트랙들을 돌려 듣는 것이 대충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의 내 음악 취향의 전부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집 창고를 뒤지다가 한 앨범을 발견했다. 그게 바로 <저스트 나우 팝스> 다. 도대체가 알 수 없는 네이밍. 꽤 오랜 기간 나왔던 NOW! 시리즈를 의식한 네이밍 같기도 하고. 나온 회사의 정체도 알 수 없고 정확한 발매년도도 알 수 없는 이 앨범의 트랙 리스트를 첨부하겠다.
1. That's Why - Michael Learns To Rock
2. Gangsta's Paradise - Coolio
3. Kiss From A Rose - Seal
4. Can I Touch You...there - Michael Bolton
5. Heaven For Everyone - Queen
6. Fantasy - Mariah Carey
7. Dreaming Of You - Selena
8. You Are Not Alone - Michael Jackson
9. Run Away - Janet Jackson
10. Whisper Your Name - Harry Connick. Jr.
11. Ode To My Family - The Cranberries
12. Have You Ever Really Loved A Woman - Bryan Adams
13. Waterfalls - TLC
14. Total Eclipse Of The Heart - Nicky French
15. Water Runs Dry - Boyz II Men
16. Another Night - Real McCoy (출처 : YES24)
세상에 이건 그냥 정신이 나간 트랙 리스트다. 대충 유추해 보면 95, 96년도쯤에 나온 앨범으로 예상된다. 마이클 런스 투 락의 절절한 락 발라드 트랙 'That's Why (You Go Away)' 로 시작해서, 95년 영화 <위험한 아이들> 의 주제곡인 쿨리오의 'Gangsta's Paradise', <배트맨 포에버> 의 OST였던 씰의 'Kiss From A Rose'... 그러다 보면 마이클 볼튼에 퀸, 머라이어 캐리에 잭슨 자매, 전주만 들어도 알 만한 트랙들이 줄줄이 콩떡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2008년의 나는 팝을 이 앨범으로 배웠다. 당시에도 12년 전 노래였으니 올드하다면 올드한 노래들이었겠다마는, 저 앨범을 처음 들은 이후 팝에 눈을 떴다. 정말 매일같이 이 CD를 돌려 들으면서 만화책을 읽거나 학원 숙제를 했고, 미국 음악이 이렇게 좋구나, 사람들이 왜 팝 팝 하는지 알겠다, 다시 말하자면 문화 충격의 나날들을 보냈다. 어디 가서 팝 좀 듣는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그 해 가을쯤부터 나는 컴퓨터를 상당히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아이로 성장했고, 물밀듯이 등장한 불법 MP3 다운로드 사이트들의 수혜를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나는 국내와 해외를 가리지 않는 서칭 능력을 이용해서 좁았던 식견을 늘려갔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이 CD 속 노래들을 검색해서 들어본 나는 뒤집어지게 놀랐다. 이 CD는 그냥 동네 정체 모를 노래방 가수들이 최대한 비슷하게 창법을 따라 해서 녹음한, 소위 말하는 길보드 CD 중에서도 악질 중의 악질인 가짜 CD였던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이 CD를 수백 번 돌려 들으며 빈약한 MR과 엉성한 가창력마저도 감미롭게 들었던 거다. 원효 대사의 해골물도 이게 해골물을 한 모금 마시고 든든히 주무셨으니까 가능한 이야기다. 해골물을 해골물이 아니라 술이나 뭐 이온 음료로 알고 몇 잔씩 연거푸 신나게 마셔대버리면 그게 사실 해골물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의 배신감, 이윽고 몰려드는 마치 트루먼 쇼와도 비슷한 체제에 대한 의구심, 번뇌와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고 나서, 나는 이 CD를 다시 듣지 않았다. 원곡이 가진 그 풍성하고 웅장한 사운드가 이 CD엔 전혀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트랙 리스트의 트랙들을 유튜브 뮤직으로 너무나도 편하게 듣는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도 내가 즐겨 듣는 음악들이다. 그러나 나는 가끔 생각한다. 어쩌면 이 CD 밖에 몰랐을 때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동네 가수 몇 명이 모여서, 자신들이 마치 마이클 잭슨이고 머라이어 캐리고, TLC고 쿨리오라고 상상하며 지그시 눈을 감고 담배 연기와 땀으로 가득한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자그마한 스튜디오에서 하루 종일 노래를 불렀을 그 모습을 상상해보곤 한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면, 멋들어지고 번지르르한 이 노래들의 뮤직 비디오보다도 그 모습이 더 아름다운 장면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상상해보는 스타가 된 나의 모습. 적어도 그들은 그걸 최선을 다 해서 해냈기에 CD 한 장에 몰래 그 마음을 담아 세상에 던질 수 있었던 거다. 불법과 합법을 떠나 그 마음이 참 소중하다. 어떻게 그 마음이 나를 찾아온 건지, 그래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제목. 저스트 나우 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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